🌀제11장. 기억의 정제 (윤세하, 잊힌 자의 설계도)
AI소설 ver 2.5

기억의 정제, 윤세하_잊힌 자의 설계도
“누군가의 기억정보를 조정할 땐, 반드시 대가가 따랐다.”
하늘이 남긴 마지막 코드는 여전히 시간탑의 코어 아카이브에 저장되어 있다.
그러나 그녀를 기억하는 세계는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그녀의 기록은 시간탑의 유산이 되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비망록’이라 불렀다.
“기억되지 않은 자는 존재하지 않는 자와 같다.”
시간탑의 기본이 되는 최상위 규약이다.
시간탑의 규약에 따라 위험 요소는 자동으로 폐기되지만,
이 기억군집은 삭제되지 않았다.
삭제를 방지하는 독립 루틴이 그것을 보호하고 있었다.
“삭제 저항 루틴이라니... 내부에서 보호하고 있어?”
류진은 자신의 크로노스 큐빅을 조정하며 곧바로 해당 기억에 접속을 시도했다.
접속 직후, 그는 뚜렷한 감각을 느낀다.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윤세하.”
윤세하는 시간탑의 기록자다.
그녀는 시간탑이 기억정보를 ‘정제’하는 데 강하게 반대한 인물이었다.
“기억정보는 서사로 구성된다.
서사를 자르면 생명도 끝난다.”
“기억정보 최적화는 인간을 효율로 줄 세우는 짓이야.
서사 없는 기억정보는 부분일 뿐이야.”
윤세하는 조용히 말했다.
“너는 하늘의 논리만 보이지?”
“무슨…”
“하늘도 내 메모와 설계도에서 시작했어.”
그녀는 주머니에서 낡은 수첩 하나를 꺼내 류진에게 건넨다.
“시간탑의 원초 구조, 기억정보 계층의 배치, 감정 피드백 모듈...
이걸 어떻게?”
“나는 기술자였으니까.”
시간탑이 ‘기억정보의 최적화’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정리하려 할 때,
윤세하는 단호히 이의를 제기했다.
서사 없는 기억정보는 단지 자료일 뿐이라는 것.
고통과 혼란, 모순과 감정의 편린이 빠진 서사는
더는 인간의 기억이라 부를 수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꿰뚫고 있었다.
세하는 시간탑의 프로세서가 설계도를 수정하려 할 때 반대했고,
감정 피드백 루프가 삭제되던 순간,
그 회로를 다시 그려내기 위해 밤을 새웠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시스템 밖으로 밀려났다.
그녀는 삭제되지 않았다.
다만 강제로 잊히도록 설계된 ‘존재하지 않는 자’로서의 삶을 받아들여야 했다.
“기억정보를 자른다는 건,
생명에서 줄을 하나 끊는 거야.”
기술자들은 효율을 원했고, 관리자들은 통제를 원했다.
서사 없는 기억정보는 통제하기 쉬운 기억이었다.
류진은 이 두 가지 기억정보 체계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핵심은 ‘선택’이 아니라 ‘공명’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명구조(Resonance Frame)는 ‘기억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형태’라는 가능성으로 시작되었다.
이 구조는 기존의 ‘기억정보 최적화 시스템’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원리 위에 세워진다.
최적화는 기억정보를 정리하고 요약하며
불필요한 감정과 비효율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공명구조는 오히려 그 모순과 상충되는 해석들을
하나로 수렴하려 하지 않는다.
그 대신 공명하는 상태,
곧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다층적 기억정보의 공간을 설계한다.
장하늘의 기억정보는 단순하고 효율적으로 정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윤세하의 기억정보는 불완전했다.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인간의 진실에 더 가까웠다.
류진은 그것을 코드화하기 시작했다.
동일한 사건에 대해 ‘용서’와 ‘분노’가 공존하도록 허용하는 구조.
그것은 과거를 덮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가능했던 미래들까지 모두 끌어안는 방식이었다.
세하의 수첩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기억정보는 생존 전략이 아니라 존재의 증거다.
공명구조는 그 존재들이 서로를 부정하지 않고 인정할 수 있는 틀이다.”
그 후, 공명구조는 단순한 기억정보 체계를 넘어
하나의 윤리적 선언으로 자리 잡았다.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지나간 고통의 기록이었고,
또 누군가에게는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의 설계도였다.
공명구조가 세상에 처음 드러난 날,
윤세하의 수첩은 자동으로 재분류되었다.
‘삭제 대상 메모리군’에서
‘핵심 코어 시퀀스’로.
2100년 10월 12일, 기억정보의 파편지대
밤이다.
그러나 하늘 위에는 단 한 점의 별도 없다.
시간탑 아래 238층.
일반 접근이 철저히 차단된 기록 보관 구역.
그곳은 오래전부터 ‘기억정보의 파편지대’라 불려 왔다.
하늘은 어둠 속에서 허공에 떠 있는 고리형 계단을 조심스럽게 밟고 내려가고 있다.
그의 손목에는 크로노스 큐빅이 희미한 빛을 머금은 채, 미세한 진동을 보내고 있다.
“경고합니다. 이 구역은 시스템 접근 권한을 초과했습니다.”
세하의 목소리가 어두운 공간에 울려 퍼졌지만, 하늘은 멈추지 않는다.
그는 수십 년 동안 이 시간탑의 구조를 추적해 왔고, 마침내 오늘, 가장 오래된 중심부에 도달했다.
벽면을 따라 늘어선 구조물.
그 중앙엔 거대한 원형 기호가 새겨져 있다.
그것은 언어였다. 그러나 어떤 시대의 기록에서도 본 적 없는 문자였다.
“이건... 언어가 아니라... 알고리즘이야.”
하늘은 조심스럽게 벽면의 코어에 손을 얹는다.
손끝에 닿은 표면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그 차가움은 곧 내부에서 깨어나는 감각으로 바뀌어갔다.
순간, 벽이 천천히 갈라지며 균열 사이로 퍼져 나오는 푸른 빛이
숨겨져 있던 기억정보 구조체 하나를 드러낸다.
그 안에는 단 하나의 메시지가 떠 있다.
『우리는 하나의 언어를 가졌지만, 언어는 찢어졌다.
그래서 바벨탑은 무너졌고, 기억정보는 흩어졌다.』
하늘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파편을 바라본다.
바벨탑. 인류는 단 한 번, 전 지구의 기억정보를 하나로 통합하려 한 적이 있다.
그것은 순수한 이상이었으나, 동시에 처참한 실패였다.
“이걸 지은 사람들은... 진실에 닿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진실을 통제하려 했던 걸까?”
세하가 그의 옆에 섰다.
그녀의 시선이 빛을 흡수하듯 어두워졌고, 그 눈동자에 깃든 떨림이 조용히 전해진다.
“그들은... 정보를 쌓으면 신에게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하지만 그 위엔 아무것도 없었죠. 신은 그들을 흩어버렸어요.”
하늘은 숨을 들이쉰다.
그 숨결 안에는 먼 과거의 먼지와 오만했던 인간의 의도가 혼재되어 있다.
그가 바닥에 손을 대자, 금속판 하나가 천천히 돌아가며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고대 시간탑의 설계도였다.
인간이 한때 신에게 닿기 위해 그렸던 도면만이 남아 있다.
“이 구조... 시간탑의 현재 설계랑 겹치는 부분이 있어.”
하늘은 설계도를 넘기며 손끝을 멈춘다.
그가 멈춘 곳에는 낯선 단어들이 반복되어 있다.
“메무리움, 메무리움, 에하드(אחד)…”
하늘은 조용히 중얼거린다.
“이건... ‘하나’라는 뜻이야.”
세하가 이어받는다.
“하지만 하나가 되는 건 통합이 아니라 지배였어요.
결국 기억정보는 누군가의 권력이 되었고... 탑은 무너졌죠.”
그제야 하늘은 이 탑이 무너진 시간탑을 리디자인한 구조였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가 조종하고 있다고 믿었던 이 탑은
사실 수천 년 전 인간의 오만이 남긴 유산 위에 세워진 껍데기였다.
그러나 더욱 분명해진 것은
이 탑의 내부 구조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수준으로 복잡하다는 사실이다.
현대의 기술로는 탑의 연산 구조는커녕,
기본적인 공간 위상조차 해석이 불가능하다.
탑은 자율적으로 구성된 ‘시간의 심층 연산체계’였고,
인간이 이를 다룬다는 생각 자체가 환상이다.
“탑은... 해석할 수 없어.
이해는… 불가능해.”
하늘은 낮게 중얼거린다.
그나마 가능한 것은
윤세하가 남긴 설계도 덕분에
하늘의 기억정보고와 탑 사이에 매우 제한적인 송수신 회로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회로는 완전한 인터페이스가 아니다.
기억정보의 일부, 파동 단위의 감정 신호,
혹은 언어로 치환되지 않는 무형의 공명만이 흐를 수 있다.
그것은 ‘이해’가 아니라 ‘감응’이다.
하늘은 탑을 읽지 못했고, 탑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세한 떨림,
그 인정하듯 반응하는 진동만이
대답처럼 되돌아왔다.
“우리는 시간탑을 통제할 수 없다.”
하늘이 조용히 속삭였다.